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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황자 두 번째 이야기]



 

1. 빌즈탄 하츠

 

깨어나셨습니까.”

바람이 잔잔하다. 그게 첫 느낌이었다. 그래서 평생 잊지 못할 거 같다.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들어온 손길이 얼굴을 매만지는 건, 막 잠이 든 아기를 다루는 엄마의 손길처럼 조심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의사가 놓은 진통제 때문인지 그 외의 다른 모든 게 느껴지지 않았다. 등가죽을 뚫고 가슴으로 나온 창은 모두 다섯 개라고 했다. 그중 하나는 정확히 내 심장을 꿰뚫었다.

그렇다. 나는 심장이 파괴되었다. 어떤 폼 울프도 파괴된 심장을 복구할 수는 없다. 폼을 할 수 있는 모든 존재들이 마찬가지다. 이런 사례는 고대의 이야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의사는 말했다. 내가 정신을 차린 날.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시간의 기억들은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 꿈을 꾼 것도 아니었고, 그저 공백. 하얀 도화지조차 존재하지 않는, 그저 무의 시간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내 얼굴을 매만진 게 바람이라는 걸 알고, 내가 지금 침대 위에 누워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정작 나 자신에 대한 건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치 시험지에 쓰인 답의 빈 공간처럼 무엇인가를 써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깨끗했다.

부상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진통제를 줄이겠습니다.”

그때부터 살아 있다는 감각이, 도화지를 가득 채웠다. 얼핏, 어떤 단어들이 조합되기는 했지만 욕이라 부를 수 있는 형태의 언어는 없었다. 보통은 내가 겪는 고통 그대로를 내뱉었고, 그 소리는 밤낮으로 방을 가득 채웠지만 어떤 인물도 나를 찾아오지는 않았다. 손을 뻗어 무엇인가 붙잡으려 해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손아귀로부터 알 수 있었던 건 외로움이었다. 그때부터는 고통보다는 고독이 더 싫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외침이 지독히도 외로워서 자꾸 눈물이 나왔다. 자신을 화타라고 소개한 의사는 부드러운 천으로 내 눈물을 닦으면서 남자는 우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런 개념이 왜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눈물은 온갖 이유를 달고 나오는 거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심장에 박힌 옹이처럼 굳게 버티고 있는 고독이 통증을 밀어내자, 그때부터 주변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말을 할 수 있었지만 내가 내뱉는 건 제대로 된 소리가 아니었다. 내가 자꾸 말을 하려고 억억, 하는 소리를 낼 때마다 화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창 하나가 목을 관통했습니다. 많이 회복하였지만 제대로 된 소리를 낼 수 있을지는 경과를 조금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주무십시오.”

화타가 주문을 읊는다. 통증을 참기 어려울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인지 화타는 자꾸만 수면을 유도했다. 있는 힘껏 손을 뻗어 그의 옷깃 붙잡았다. 온몸의 신경을 눈에 집중한다. 그를 쳐다보는 이 두 눈이 튀어나와도 좋으니 제발 그만두라는 신호를 보낸다. 화타는 깜짝 놀라서 주문을 멈추고 나를 바라본다. 내 눈에서 어떤 걸 보았을까. 그는 마치 자식의 죽음을 전해 들은 사람처럼 침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자님. 지금은 새벽입니다. 황자님에게 하루는, 앉은뱅이 장님이 세계를 감싸고 있는 뱀의 몸을 더듬어 가로지르는 걸 그저 지켜만 보는 사람처럼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그래도 정말 깨어 있으실 생각이십니까?”

지루함을 표현하는 화타의 목소리는 강바닥의 바닥에 묻힌 바위의 표면을 긁는 강철의 노래처럼 끔찍했다. 말을 할 수도,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으니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지만 화타는 역시 몇 번이고 머리를 주억거렸다.

알겠습니다. 대신 오늘은 정오에 한 번 더 찾아오겠습니다. 그때 생각이 변하신다면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화타가 나가자, 더욱 지독해진 정적이 슬금슬금 기어 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침대 위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다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목이 가느다란 화병이 있었는데 아래쪽에는 달을 향해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있는 회색 늑대가 그려져 있었다. 화병에는 부채꼴 모양의 자줏빛 꽃잎 네 장이 뭉친 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는데 특별한 향은 나지 않았다. 그 너머로는 창문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모양인지 커튼 밑으로도 빛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힘들게 정면, 다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화타가 나간 문이 보인다. 문의 크기는 어림잡아 화타 세 명을 위로 올리고, 다시 세 명을 가로로 눕히면 딱 맞을 듯하다. 커다란 달이 문 한가운데에 새겨져 있고, 그 주위로 화병에 꽂힌 꽃과 비슷한 모양의 무늬들이 모여 하나의 그림이 된다. 늑대의 형상은 찾을 수 없다.

향기가 없는 자줏빛 꽃. 과욕을 드러내는 늑대. 그리고 달. 이 세 가지가 나와 관련이 있는 것인가. 황자라고 불리는 걸로 보아 아마도 이 황국의 상징일 수도 있다. 웃기네. 내 자신에 대한 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데, 이런 개념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다. 이건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 외에도 궁금한 건 많았다. 설명이 필요한 일이 너무나도 많았고, 그것에 대한 문답을 홀로 진행해도 시간이 충분할 듯싶었다. 그래, 일단은 이거다. 이걸로 시작하자-라고 생각할 무렵에,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니, 정확히 소리가 난 것은 아니다. 상대는 아주 조심스럽게, 방문을 예고하지 않은 암살자처럼 슬그머니 문을 열었고, 그러나 역시 암살자가 아니었기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정리하자. 목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단발의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였다. 고급스러운 원단으로 만든 곤색 원피스에 하얀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시녀쯤 될 거라 짐작이 되었다. 내가 깨어나서 처음 만난 사람은 화타였다. 저 여자는 내가 깨어난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방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내내 바닥을 보며 이동하고 있었다. 창문 가로 가더니 조심스럽게 커튼을 걷는다. 행여나 소리가 날까 봐 막 잠이 들려고 하는 갓난아이를 다루듯 손목을 부드럽게 사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이는 십 대 후반이나 되었을까. 얼굴에는 아직 앳된 모습이랄까.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 얼굴 근육에서 겁에 질린 소녀를 찾을 수 있었다.

창문을 통해 쪼개지는 빛이 화살처럼 날아와 내 눈동자에 박힌다. 이제 해가 뜨고 있는 중이라 빛의 강도가 그렇게 강하진 않았지만 내가 며칠 동안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짐작이 될 정도로 눈의 상태는 쇠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들, 내 정신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의 밑바닥을 헤매는 동안의 기억, , 혼란 등은 전혀 없다. 오랫동안 산정 아래를 지배하고 있던 먹구름이 일순간 사라졌다. 지금은 산 아래에서 고개를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별자리들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별의 개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또렷하고 온전한 정신이 나를 지탱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안이 비어 있을 뿐이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사이, 여자는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라고 느꼈던 것이, 사실은 바람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창문을 통해 넘어온 바람은 겨울을 몰고 온 여신의 손길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차갑고 매서웠다. 이미 새하얀 머릿속이 이제는 투명해질 정도로 얼어붙고 있는 것 같았다. 통증 때문에 무뎌야 할 몸의 감각이 오히려 날을 숫돌에 갈아 놓은 칼처럼 날카롭다.

눈을 감고 호흡을 길게 내쉬었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진정하자. 마음을 다듬고 있는데 그 위로, 타인의 공포가 바람의 입김에 떠밀린 안개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뜨고 여자 쪽을 바라보니 그녀는 붉은 카펫 위에 몸을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두려움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말을 할 수 없으니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시간이 3분가량 지났을 텐데도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팔을 움직였다. 가장 가까운 건 역시 꽃병이다. 찢어진 근육들이 포크를 들고 사정없이 뇌를 찌르는 듯한 느낌에 숨이 멎을 듯했다. 간신히 움직인 팔로,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툭툭 꽃병을 건드렸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꽃병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탁자 위에서 떨어졌다. 여자가 이 소리를 듣고 제발 고개를 들어서 나를 바라봤으면 했는데, 그녀는 오히려 더욱 고개를 파묻었고 부들부들 떨었다. 이쯤 되면 심각한 복통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해도 좋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소리를 듣고 방밖에서 사람이 한 명 더 방으로 들어왔다. 바람을 연상시키는 여러 갈래의 무늬가 금빛으로 수놓아진 청색 원피스. 나이는 앞서 들어온 여자보다 조금 많아 보였지만, 그래도 역시 소녀였다. 수확을 앞둔 논에서 물결치고 있는 이삭처럼 고운 빛깔을 품고 있는 금발. 어깨와 허리의 중간쯤 길이의 머리카락은 검은색 끈으로 단정히 묶었다. 그녀는 엎드려 있는 여자와 깨어나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머릿속에서 상황을 정리한다. 그리고 이내 내게 허리를 굽히고 정중하게 사과를 한다. 말은 꺼내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벙어리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혀를 깨물었다.

금발의 여자가 치마 속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단도를 꺼내더니 바닥에 엎드려 있는 여자를 향해 미끄러지듯 걸어간다. , , - 하는 순간에 그녀는 거칠게 상대의 까만 머리를 쥐어 잡고 뒤로 젖혔다. 부들부들 떠는, 힘없고 가녀린 소녀의 새하얀 목이 내게 아주 잘 보였다. 광활한 초원을 처음 본 야생마처럼 심장이 두근거린다. 움직일 수 없지만, 지금, 반드시 움직여야 했다. 내 몸은 여기 그대로 있는데, 저기 아득한 곳에서 생명을 탐하는 칼날이 움직인다. 그러니- 가야만 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었다. 깨어난 직후 내가 떠올린 마지막 기억의 흔적을 지독한 사냥개처럼 물고 늘어진 것. 일명 이라고 새겨져 있는 단어에 대한 몸의 반응이었다. 다리의 근육이 변하고, 팔이 길어지고, 회색빛 털이 솟으며, 눈으로 보이는 세상의 시간이 느려지는 듯하고, 단도를 꿰뚫어버리는 손톱이 치솟는 것까지. 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의 땀구멍에서 솟아나는 공포의 냄새와 조금 전까지 단도라 불릴 수 있었던 작은 꼬챙이를 쥐고 있었던 금발의 소녀가 지독한 살기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감각. 이 모든 게- 머리로는 전혀 모르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거였다.

하지 마.”

놀랍게도, 목소리가 나왔다. 나뭇가지로 자갈밭을 긁는 듯한 소리였지만 들을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생각이 미처 정리되기도 전에 몸이 행했기에, 나는 조심스레 아래쪽을 살폈다. 내 손톱이라 믿어야 할 물체가 단도를 잡고 있었다. 잡았다기보다는 찔렀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데, 손톱의 끝이 단도를 관통했었다. 다른 손은멀쩡히 뒤쪽을 향해 있었다. 금발의 여자는 고개를 들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한다.

황자님께서 불편하시다면 밖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이야. 세다.

불편하다는 게 아니야. 여기서도, 밖에서도 하지 마. 아직-”

어리잖아. 라는 말이 입 끝에 걸려 나오지를 않았다. 왠지 모를 불안함이 솟구친다. 내 마음이 내 머리를 비웃고 있었다. 내가 말을 멈추자 금발의 여성은 내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무엇을 발견했는지, 눈을 질끈 감고 그제야 단도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움찔. 다리가 잠깐 휘청거렸다. 내가 얼마나 힘을 주고 있었는지는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힘이 제법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니아젤, 황자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녀는 쥐고 있었던 머리카락들을 놓자 간신히 공포를 삼키고 있었던 하녀의 숨이 화산처럼 터졌다. 니아젤은 개의치 않고 나를 지나쳐 침대 곁으로 갔다. 바닥에 떨어진 꽃병과 꽃들을 잠깐 바라보다가 무릎을 꿇고 정리한다. 그것을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하고 다리를 움직이려는데, 온몸의 기운이 순식간에 다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세상이 옆으로 쓰러진다.

 

폼을 하셨더군요. 그 감각은 기억하시겠습니까?”

화타가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계속되는 고열로 인해 몇 번이나 강 너머의 꽃밭을 구경하고 겨우 돌아왔다. 내 침묵이 길어지자 화타는 인심 좋은 노인처럼 허허 웃으며 우연이라도 폼을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설명했다.

좋습니다. 대부분의 상처가 거의 회복되었습니다. 골절되었던 뼈도 거의 다 붙었고요. 이제 움직이셔도 괜찮겠습니다. - 목소리는 완치가 된다 할지라도 예전과 같지는 않을 겁니다. 말씀을 하실 때 목구멍을 긁는 듯한 느낌이 계속 날 겁니다. 상처가 워낙 치명적이었기 때문이죠. 황제 폐하의 가슴에 있는 흉터를 알고 계시죠? 폐하의 유년기 시절에 바실리스크를 잡다가 생긴 거였습니다. 그 이후로 몇십 번이나 폼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처는 지금까지도 가슴에 남아 있지요.”

내가 황자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고로 내 아버지가 황제 폐하라고 불리는, 엄청난 인물이라는 것도 거북했다. 꿈같은 소리라서, 직접 보기 전까지 마음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 물었다.

니아젤은 누구지.”

금발의 여성. 단아하고 차분한 느낌을 주는 미인이었다. 목소리가 낮게 깔린 것으로 보아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은 아니고, 하녀의 목을 베야겠다는 생각을 몸소 실천하려 했었던 대담한 행동은 분명 전사의 피에서 나온 거다.

바람의 숲에서 태어났으며 전 우든 울프 족장의 셋째딸입니다.”

뭔지- 전혀 모르겠다.

다른 건?”

. 여자 중에서 폼을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존재입니다. 그만큼 자질이 뛰어나며 희소합니다. 그리고 뭇 사람들은 그녀를 황자님의 쯤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어려 보이던데.”

황자님과 동년배입니다.”

그래. 이제야 내 나이를 얼추 알게 되었군.

첩이라고? 부인이 아니라?”

미리 용서를 구하겠습니다만, 황자님께서는 열네 살이 되던 해에 니아젤과 합방을 하셨습니다. 물론 이것도 기억이 나지 않으시겠지만, 그때 결사반대를 하던 전 우든 울프 족장의 한쪽 다리를 잡아 뜯어 개에게 던져주셨지요.”

?

그리고 다음 날 그녀를 황궁으로 데리고 온 후, 귀양을 보낸 죄인처럼 동쪽 별궁에 내버려두셨습니다. 그게 벌써 7년 전의 일이군요. 현 우든 울프 족장은 그녀의 첫째오빠로 황자님을 뼛속 깊이 증오하고 있습니다. 그는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는 자로 자주 입궁을 하니 지금 상태에서 단둘이 마주치는 일은 없으셔야 할 겁니다.”

감각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머리가 무거워졌다. 세 사람 정도가 머리 위로 올라간 듯했다. 내가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만나면 목숨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겠군. 알겠어. 그러면 이제 가져와도 좋아.”

?”

내 목숨을 노리는 자들 명단. 책으로 쓰면 한 열 권쯤 되나? 아니면 한 수레 정도는 채울 수 있어?”

허허. 농담이 나오시는 걸 보니 체력을 많이 회복하신 모양입니다. 좋습니다. 알고 싶으신 건 모조리 이 노인네에게 물어보시죠.”

왕성한 학구열이라고 해야 할지. 비어 있는 우물을 어떻게든 채워 보려는 욕심이었는지, 피로를 잊고 긴 시간 동안 문답을 주고받았다. 그 결과, 얼추 나에 대한 인식을 새하얀 도화지에 그릴 수 있었다.

일단 사람들은 나를 비탄 황자라고 부른다. 빌즈탄 하츠가 정식 이름이지만 까닭 모를 이유로 비탄이라 부르는 걸 더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개새끼다. , 이건 내가 늑대의 모습으로 폼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격적인 면을 포함해 여러 모로 개새끼라는 건데, 일단 앞서 나왔던 니아젤의 이야기가 그중 하나다. 다른 걸 또 얘기하자면 길어지고 지루하니 간략하게 줄여 싸움광이었고, ‘안하무인이었고, 꽤 많은 사람을 자기 손으로 찢어 죽인 살인광이었다.

원한을 따지자면 내가 만든 무덤의 수를 헤아리기 어렵고, 그걸 명단으로 작성하자니 한 수레로도 부족할 거라고 말했다. 내가 얼마나 개자식이었는지 모든 걸 다 듣고 나서야 비로소 웃을 수 있었는데, 그건 저번에 있었던 망설임 때문이었다. 내 마음이 내 머리를 비웃은 건 그래서였다. 개새끼가 하루아침에 사람이 되려고 하다니. 멍멍 짖던 입에서 사람의 말이 손쉽게 제대로 나올 리가 있나. 그런 주제에 더럽게 강하고 명이 질긴 개새끼라 지금껏 아무도 죽이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황제의 명으로 동쪽 국경순찰을 가던 도중 암살자들의 습격을 받아 사경을 헤매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때 암살자가 오지 않은 게 더 신통하군. 단지 황궁이기 때문은 아닌 듯한데.”

밖에 니아젤이 있지 않습니까.”

?”

아시다시피 그녀는 우수한 전사입니다.”

아니, 내가 말하려는 건 그게 아니잖아. 방문 밖에 그녀가 혼자 있다고?”

. 니아젤이 경비를 서고 있습니다. 황자님께서 궁으로 돌아오신 이후부터 줄곧 이 방을 지키고 있지요. 숙식 또한 모두 저 문 근방에서 해결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니까 다 큰 처녀가 저 문 밖에서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씻지도 못할 뿐더러, 한시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호위를 서고 있다고?

대체 왜?”

지금껏 묻는 말에 시원스레 대답을 해 주던 화타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진료를 마치고 화타가 나가자 마치 교대라도 하는 것처럼 니아젤이 들어왔다. 모든 사정을 듣고 나니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나를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한다거나 고개를 숙이고 끙끙거려도 아프냐고 묻지는 않지만, 그녀는 이미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으로 나를 위하는 중이었다. 정말로, 대체 왜?

니아젤은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침묵처럼 조용한 발걸음으로 방을 가로지른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다. 이제 잘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흠흠.”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군기침을 두어 번했다. 방문 쪽으로 나가던 니아젤은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고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표했다. 이건 부인도 첩도 아니고, 그냥 수하 정도의 취급이 아닌가.

혹여나 불편하신 게 있으십니까?”

마치 안주인처럼 말한다. , 그래. 이곳은 동궁에 딸린 별궁이다. 내가 그녀에게 주었던, 다르게 말하자면 내가 그녀를 유폐한 곳이다. 그러니 이곳의 주인은 니아젤이라 할 수 있다. 쓴 약초를 꼭꼭 씹어 삼키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괜찮아. 그것보다 이쪽으로 좀 오겠어?”

이쪽으로 와 달라는 말에 니아젤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조금 놀란 모양이다. 잠깐 동안 머뭇거렸지만 별다른 저항 없이 걸어온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발걸음이 느리다.

좋아. 앉아. 고개가 아프네.”

알겠습니다.”

니아젤이 앉는다. 바닥에. 하아.

아니. 바닥 말고, 침대에.”

.”

침대의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쳐 거의 공중부양을 하듯 앉는다. 나는 이불을 걷고 그녀의 반대쪽으로 빠져나갔다. 방바닥 위로 두 발이 닿으니 다리부터 타고 올라오는 통증이 뇌를 툭 치고 내려갔다. 아프긴 했지만 어쨌든 일어설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황자님. 저는

누워. 그리고 자.”

당황하며 한사코 거절하려는 그녀에게 시위를 하듯 나는 제자리에 앉았다. 니아젤이 깜짝 놀라 일어선다. 어찌할 줄 모르는 그녀의 생생한 표정과 눈가 밑에 자리 잡은 피로가 내 결심을 돕고 있었다.

니아젤이 침대에 눕지 않겠다면 난 여기서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러니 누워.”

내가 안하무인이었다면 고집이 상당했을 터다. 니아젤도 그걸 알고 있는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침대에 누웠다. 물가에 아이를 두고 온 엄마처럼 불안해하는 걸 보고 있자니 미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일단 눕는 데까지 성공하자 나는 일어서서 이불을 끌어 그녀의 목까지 덮어줬다. 이래도 그녀는 잠을 자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확신을 줘야만 했다.

말재주가 시원찮아서 그냥 얘기할게.”

?”

저 창문 너머로 햇빛이 넘어와 날짜가 바뀐다고 해도 난 여전히 지금처럼 네 곁에 있을 거야. 그러니 안심하고 자도 좋아.”

그런 문제가

내가 오른손을 들자 니아젤은 깜짝 놀란 토끼처럼 굳어버렸다. 덕분에 나도 놀랐지만, 침착하게 검지로 그녀의 이마를 꾹 눌렀다.

반론은 그만. 이제 그만 자도록 해. 밤은 길다는 걸 잘 알고 있잖아.”

그래. 홀로 지새우는 밤은 너무나 길다.

황자님.”

니아젤이 눈을 감자 겨우 숨을 돌렸던 찰나에, 그녀가 갑자기 불러서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대답하지도 않았지만 움직이지 않고 있었기에 내가 곁에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내일 아침이 찾아온 이후에도 황자님이 제 옆에 계신다면 저는,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이후에 이곳을 떠나라 하신다면 더는 군말하지 않고 떠나겠습니다.”

우와. 숨을 멈추길 정말 잘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물 밑바닥에서 한 세기 동안 쌓였던 한숨을 모조리 긁어모아 내뱉었을 거다.

마침내 니아젤이 잠들었다. 나는 방 끄트머리에 있는 탁자에서 등받이가 있는 의자 하나를 들고 침대 곁으로 갔다. 좋아. 생각 좀 정리하자.

빌즈탄 하츠. 익숙하지 않지만 이게 내 이름이다. 내 위로는 형님이 한 분 계시지만 지금은 황궁에 없고 북쪽 전선에 있다. 내 아래로는 이복 여동생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부우헨 플로아. 빌즈탄이 달을 삼키는 회색 늑대를 뜻하는 고어라면, 부우헨은 별을 담는 호수의 여우를 뜻하는 고어다. 화타와의 긴 문답에서 얻어낸 정보에 따르면 빌즈탄 하츠라는 이름을 가진 값진 개놈은 형의 말을 그나마 듣는 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복 여동생과는 견원지간으로 사이가 무척 나쁘다. 그 까닭은 아주 간단하다. 그녀의 어머니가 내 친어머니를 독살했다. 그리고 아버지라는 인물, 황제는 그러한 정황을 알고서도 묵인했다. 형이 황궁을 떠나 북부 사령관으로 자청하여 떠난 건 그즈음의 일이었다.

집안이 그냥 개판이네.”

자세한 사정은 들을 수 없었지만 개괄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니아젤이 기절한 사람처럼 잠을 자고 있는 사이에 하녀가 들어왔다. 나 때문에 죽을 뻔했던 그녀는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앉아 니아젤 곁에 머물고 있는 내 모습을 보더니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마도 내가 니아젤을 죽인 게 아닐까라는 의심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녀의 이름은 슐엔. 7년 전부터 니아젤의 전속 하녀로 일하고 있었다. 어제 나 때문에 거의 죽을 뻔했다. 떨고 있는 그녀를 애써 모르는 척하며 나는 책을 좀 가져다 줄 것을 부탁했다.

어떤 책을 말씀하시는지요.”

역사책 종류면 좋겠는데. 최근 일까지 세세하게 기록된 걸로.”

, 그거라면 황궁기록관에 적당한 게 있습니다. 곧 찾아오겠습니다.”

그리하여 슐엔은 금세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여전히 살아 있는 저명한 역사가 김로텍 율츠가 저술한 제국기 Vol. 12최신 개정판을 가지고 왔다. 거기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그토록 망나니짓을 하고 다님에도 쉽게 쫓아내지 못했던 건 이유가 있었다.

나는 전쟁영웅이었다. 북쪽에서 마물과 싸우고 있을 형님을 대신해 동쪽으로 가 용의 피를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는 콜덴 왕국과의 전쟁에서 단독으로 적진을 돌파해 적 사령관을 죽였다라는 기록을 읽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돌진하는 기병대를 뚫고 들어가 전열을 갖춘 보병들의 머리 위를 단번에 뛰어넘어 적 사령관의 머리를 물어뜯어 뽑아버리겠다고 생각한 거냐. 심지어 그걸 행동으로 실천했다고?

지이이이잉-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돌진하는 기병? 전열을 갖춘 보병들? 무슨 개소리야. 그게 아니잖아. 네가 생각하는 전쟁은 여기에 없어. 제대로 읽고 생각하는 거야? 사람이 늑대의 탈을 쓴 것처럼 변신을 해. 일단 그것부터가 정상이 아니라고. 네 상대는 용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놈들이야. 그네들은 정상이었을 거 같아? 비늘이 있겠지. 꼬리가 있고. 날개도 있을 거라고. 어쩌면 무시무시하게 생긴 뿔도 돋아났을 거야. 그놈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화염을 내뿜고, 사냥을 시작한 매처럼 순식간에 적들을 낚아채 저 높은 곳에서 떨어뜨릴 수 있어. 아군 병사들의 수만큼 적들에게 낙석이 공급되는 거지. 네가 어떻게 했겠어? 날아다니는 한 놈을 잡아다가 산 채로 날개를 뜯었어.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자 적들의 공격이 너에게 집중되었지. 넌 그놈들을 마치 계단처럼 이용했어. 그래서 적 사령관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거야. 하늘 전체가 자신들의 것인 줄로만 알았기 때문에 방벽 같은 걸 세우지 않았거든. 잘 기억해 봐. 네 목구멍에는 아직도 그 녀석의 피가 마르지 않고 흐를 텐데. 그 뜨거움이 기억나지 않아?

기억 안 나. 미친놈아 저리 꺼져.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뇌가 흔들리면서 관자놀이 부근이 찡-하니 아팠다.

그 전투에서, 넌 죽을 수도 있었던 수많은 병사들을 살린 거야. 그래서 네가 전쟁영웅이 되었지. , 그렇다고 콜덴 왕국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전쟁에 졌으니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지. 그로 인해서 이득을 본 사람들은 다들 널 좋아해. 병사들도 널 좋아했다고. 물론 나도 널 좋아하지.

갖가지 생각들이 격렬하게 부딪치자 몸이 뜨거워진다. 확실히 지금 상태는 정상이 아니다. 내가 겪고 있는 건 기억상실이라 할 수 없다. 정말로 모든 게 지워졌다면 이렇게 침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것도 없다는 게 모든 걸 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기억을 상실한다는 게 가능할까.

내가 원한 것인가.”

거의 죽을 뻔했다. 사실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부상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걸 원했다면 대체 왜? 무엇을 위해? 어째서 그런 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거야. 하아. 미치겠네.

새벽이 느릿느릿 고개를 넘어가는 도중에 니아젤이 깨어났다. 아마 화장실이 가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니 드레스를 입은 채 그대로 재운 게 잘못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의 꼬리가 도달했을 때, 내 스스로 기억의 일부를 지웠을 거란 확신이 더욱 강해졌다. 여하튼, 그녀는 여전히 옆에 있는 날 보고 거의 울 뻔했다.

울지 말고. 옷이라도 갈아입고 오는 건 어때. 드레스는 좀 불편할 텐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 . 아니, 하지만, . 그게.”

어어, 뭔가 말하고 싶은 게 많은 모양인데. . 사정을 모르니 내가 무엇을 요구하는 건 좀 무리가 있겠지. 일단 니아젤이 편할 대로 하는 게 좋겠어.”

. 황자님 명을 따르겠습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리긴 했지만 니아젤이 돌아왔다. 적어도 드레스보다 편하게 보이는 곤색 셔츠와 바지를 입고 왔다. 물수건으로 땀을 닦고 온 것인지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녀의 뒤를 따라 슐엔도 수레 하나를 밀며 방으로 들어왔다. 수레 위에는 쿠키와 과일 같은 간단한 다과가 차려 있고, 그 옆에는 책 몇 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국 역사와 주변국들에 관한 책을 좀 챙겨왔습니다.”

, 고마워. 일단 저 테이블을 가져와야겠군.”

제가 하겠습니다! 황자님은 그대로 계세요.”

수레를 밀고 들어오던 슐엔이 서둘러 테이블 쪽으로 달려갔다. 한 명씩 따로 있을 때는 몰랐는데 슐엔과 함께 있는 니아젤의 키는 제법 큰 편이었다. 내 키와 비교하자면 니아젤은 손바닥 하나 정도 차이로 작았고, 슐엔은 딱 내 가슴 높이 정도였다.

혹시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실까요?”

지금은 딱히 생각나지 않아. 나중에 떠오르는 게 있다면 꼭 말할게. 그럼 옷도 갈아입고 왔으니 계속 잠을 자도록 해. 겨우 그거 잤다고 피로가 풀렸다고 말하지는 말고.”

아니요. 정말로. 괜찮습니다. 황자님께서 깨어 계시니 저도 옆에 있겠습니다.”

후우. 내가 한숨을 내뱉자 니아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건 니아젤 때문이 아니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일단 슐엔을 지켜줘.”

?”

손님이 오셨군.”

암살자였다. 아니, 정정한다. 암살자이었다. 문은 거침없이 열렸지만 소리는 하나도 나지 않았다. 새까만 천을 전신에 두르고 두 눈만 시퍼렇게 뜨고 있는 녀석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수는 모두 다섯. 쇠뇌를 들고 있는 녀석이 둘이었고, 나머지는 검을 들고 있었다. 그들의 주위에서 스멀스멀, 죽음의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다. 나는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테이블을 옮기려던 슐엔이 종종걸음으로 급히 왔다. 쇠뇌로 그녀를 맞출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니아젤이 셔츠의 소매를 걷었다. 곧바로 폼을 할 생각인 듯했다. 나는 팔을 뒤로 뻗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황자님?” “아직 아니야.” 저들도 곧바로 달려들 생각은 없는 듯했다.

암살자들 중 가장 앞서 있던 이가 자신이 들고 있었던 검을 툭 던졌다. 데굴데굴 내 앞으로 굴러오는 걸 발로 밟아 멈추었다.

비탄 황자. 명예를 지킬 기회를 주겠습니다. 자결하십시오. 그러면 백성들은 당신을 전쟁영웅으로 계속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 그래. 전쟁에서 얻었던 상처가 악화되어 숨졌다정도로 끝내면 구설수는 없겠군. 나는 바닥에 있는 검을 걷어차 그들에게 돌려주었다.

가져가라. 그리고 밖에 나가 황실경비대가 잘 보이는 곳에서 자결해. 너희가 여기서 죽으면 고생해서 치워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슐엔이 아니었으면 하거든.”

계속 말을 하니 목이 아팠다. 목소리에 낚싯바늘이 걸려 있어 성대로부터 단어가 튀어나올 때마다 식도를 긁는 것처럼 느껴졌다. 상대가 내 목소리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는지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어떻게 그 부상에서 살아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를 상대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 말은 즉, 너희가 날 찔렀다는 얘기군.”

…….”

어디 보자. 내가 깨어나기 전까지 날 경호하는 이는 니아젤밖에 없었다. 황실경비대는 내가 부상당했다는 것조차 몰랐을 테지. 그렇다면 너희들은 황실경비대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정당한 방법을 알고 있다. . 그래.”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이다.

황제 폐하로군.”

황실경비대의 모든 감시체계를 손쉽게 무력화시키고, 황자가 밖에서 습격을 받아 거의 죽을 뻔했다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하라는 절대적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는 그분밖에 없다.

그리고 제군들은 황실경비대겠지. 복면을 풀고 얼굴을 보여라.”

침묵이 잠깐 헛기침을 하며 우리 사이를 지나갔다.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이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는 자신의 앞으로 굴러온 검을 오른손으로 집어 들고 한 차례 휘두르며 손잡이를 거꾸로 잡아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왼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춘다.

황실경비대, 비탄 황자님을 뵙습니다.”

. 이름과 얼굴을 밝히지 않았다는 건 좋았다. 적어도 내 뒤의 두 사람까지 죽일 생각은 없단 얘기니까.”

, 맞습니다.”

거슬린다. 그들의 주변에서 거뭇거뭇한 안개 같은 게 계속 피어오르고 있다. 마치 자신을 사용하라는 것처럼 손을 흔들며 내게 말을 건네는 듯했다. 나는 손을 휘저었다.

돌아가라.”

그러자 검은 안개는 춤을 추는 것처럼 내 손짓을 따라 일렁거렸다. 저게 나에게만 보이는 것인가. 아마 그럴 거다. 황실경비대가 대신 대답한다.

그럴 수 없습니다.”

니아젤에게 약속했다. 더는 혼자 있게 하지 않겠다고.”

뒤에서 숨을 급하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니아젤이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듯하다. 입술이 메말랐다.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뒤쪽에 있던 두 명이 쇠뇌를 이쪽으로 겨누고 시작해서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가 피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경고하는 것이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내가 천천히 오른손을 들자 쇠뇌를 들고 있는 대원의 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손가락에 힘을 주고 있는 것이다. 폼을 하려는 순간 바로 쏠 것이다. 몽실몽실. 안개가 구름처럼 뭉친다. . 이 방법은 아닌가. 그래서 손가락을 폈다. “뭐하시는 겁니까?” 그들이 헛짓을 못하도록 간략하게 대답한다. “, 실험.” 이건가. 녀석의 사지를 붙잡는다는 생각으로 손목을 비틀면서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그들 주변에 있던 구름들이 사방에서 던진 밧줄처럼 황실경비대의 손발을 붙잡았다. . 성공한 건가?

살짝 팔을 뒤로 내밀어 두 여자를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 나도 같이 이동했다. 다행스럽게도 화살이 발사되지는 않았다. 복면 안에 있는 눈동자가 외길 낭떠러지에서 끊어진 다리를 만난 여행자처럼 흔들렸다.

황자님?”

니아젤이 나를 불렀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 게 생각보다 집중이 더욱 필요했다.

별궁 외문에 둘이 더 있어. 가서 제압해. 죽이지는 말고. 슐엔은 저들의 무장을 해제시켜.”

두 여자가 대답한다.

, 명을 따르겠습니다.”

니아젤이 꼼짝달싹 못하는 황실경비대의 곁을 지나면서 까만 안개들을 건드렸지만 그들을 묶는 끈이 풀어지거나 흩어지지는 않았다. 마치 그림자처럼 통과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뚫고 나갔다. 문제는 슐엔이었다.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기 때문에 가까이 가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그녀의 힘으로는 무기를 꽉 쥐고 있는 경비대원의 손가락을 억지로 펼 수가 없었다. 몇 번을 다시 시도한 슐엔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나를 쳐다봤다.

. 안 주는데요.”

그러게.”

집중하자. 집중하자. 집중하자. 계속 집중을 되뇌면서 경비대원 쪽으로 걸어갔다. 세 걸음 정도 사이를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이마에서 땀이 나는 게 느껴졌다. 이건 생각보다 정신적인 소모도 상당하다.

난 제군들을 가족들에게 돌려보내고 싶다. 가서 실패했다고 말하면 돼. , 내가 대마왕쯤으로 보였다고 설명해도 괜찮아.”

어떻게 하신 겁니까.”

설명할 수 있으면 나도 좋겠는데, 그럴 만한 어휘를 가지고 있지 않아.”

이건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다루기가 어려움 맹수와 같다. 손에 채찍을 들고 있으니 그나마 말을 듣는 시늉이라도 하고 있지만, 그 채찍이 내려가거나 손에서 놓쳐버린다면, 어김없이 상대를 물어뜯거나 주인에게 달려들 수도 있다.

죽다 살아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제군들 근처에서 이상한 게 보인다. 그것들의 도움을 받았지. 그리고 이 이상하면 설명하지 않아도 무조건 확실한 게 딱 하나 있다.”

거짓말을 하시는 건 아니군요.”

. 그래.”

, 외문에 있던 기척이 사라졌다. 잘 정리된 책장처럼 보이는 니아젤의 분노가 동쪽 별궁 전체로 퍼진다.

이제 남은 건 제군들뿐이다. 잘 결정해. 아참, 자결은 안 돼. 아까 말했듯이 치우기 귀찮으니까. . 그래. 그렇다면 다른 방법으로 해 보자. 지금 풀어줄 테니 순순히 날 따라올 수 있겠나? 보다 넓은 곳으로 가려는 것뿐이야. 그 뒤는 거기서 얘기하지.”

어째서 이 순간에도 저들의 눈동자는 저렇게 빛을 품고 있을까.

정말로 거짓말이 아니시군요.”

그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내가 침착하게, 주먹을 쥔 손을 펴고 손바닥을 바닥으로 향했다. 서서히, 그들을 붙잡고 있던 안개들이 대형 방패에 눌린 것처럼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슐엔.”

.”

.”

?”

당황하는 슐엔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황자다. 그들의 앞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암살자들의 사이를 지나 방 밖으로 향했다. 다행스럽게도 검이 내 몸을 찌르거나 화살이 박히는 일은 없었다. 니아젤이 며칠 동안 머물렀던 작은 응접실을 지나 문 하나를 더 열자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옅은 푸른빛이 도는 돌들이 바닥에 깔린 작은 공터가 우리를 반겼다.

연무장인가?”

아니요. 그냥 마당입니다. 원래는 꽃나무가 심어져 있었던 정원이었는데 니아젤님께서 관리하기가 귀찮다는 이유로 평평한 돌을 구해 바닥에 깔아 지금처럼 만들었습니다.”

돌보는 건 서투르다는 얘기군. 내가 상상했던 것만큼 넓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는 충분했다. 마당의 가운데에 선 나는 암살자들을 바라보았다. 엉뚱한 곳에 놀러 온 사람들처럼 쭈뼛쭈뼛 서 있는 그들에게 숙제를 마무리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주기로 했다.

목이 아프니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여기서 실패한다면 돌아가서 경험하고 느낀 것을 보고해.”

비탄 황자님. 저희는 결투 같은 걸 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게 아닙니다.”

목이 아프다고 했잖아. 슐엔의 손을 꼭 붙잡았다. 만약 내 계획이 실패할 경우가 생긴다면 그녀는 저들의 인질이 될 확률이 높았다. 멀리 있는 것보다 가까이 두는 게 낫다. 그리고 왼손으로 그들에게 신호를 보낸다. 덤벼. 멍청이들아.

두말할 것도 없이 화살이 날아온다. 나는 믿었다. 사람 간의 신뢰가 아니라, 하늘을 나는 갈매기가 날갯짓을 멈춰도 당분간은 그대로 허공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저 막연하게 바라만 보아도 괜찮을 거라는 믿음. 머릿속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괜찮아. 이제 너는 죽고 싶어도 쉽게 죽을 수 없을 거야.

내 심장을 정확히 노리고 날아오던 화살은 재가 되어 가슴에 부딪쳤다. 아니, 가슴에 부딪치기 전에 안개처럼 흩어졌다. 저들이 침을 꼴깍 삼키거나 이를 악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비록 하늘에 달이 뜨지 않았어도 별빛이 남아 있었다. 그 아래에서 검이 서늘 퍼릇토록 빛을 품는다. 그는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할 거다.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아니, 이건 아까 물어보았다. 황자 자신도 무엇인지 모른다고 했지. 그렇다면 저건 요술인가? 아니면 신의 가호인가? 후자라면 왜 하필 저놈에게 신의 돌봄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화가 나려고 하는 건 왜 내 자신일까. 나도 묻고 싶다. 이게 신의 가호라면, 대체 왜 인가.

한 발이 더 날아온다. 애초에 피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건 의도적으로 빗나가게끔 쏜 거였다. 머리 위로 날아간 화살은 멀쩡한 모습으로 벽에 부딪쳐 튕겨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그들은 엄숙한 분위기를 입에 물고 다가온다.

저절로 긴장이 된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흥분되기 때문이었다. 아아, 그래. 사람을 죽여야 하는 순간에 온다면 기꺼이 그 일을 수행할 거라는 걸 수용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 뒤로 다가오고 있는 인기척이 있다. 그녀에게 명령한 것처럼, 내 자신에게도 명령한다. 죽이지는 마라.

가장 앞서 오던 이가 위로 솟구친다. 함정이다. 진짜는 좌우에서 오는 협공이다.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닿지도 못할 것들.

내리치고, 시간을 두고 좌우로 찔러 들어오는 검들은, 모두 안개가 되었다. 오른손을 붙잡고 비명을 지른다. 검을 잡고 있던 손에서 증기가 피어오른다. 그토록 침착하던 눈동자에서 공포가 싹을 틔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내 입술에도 서슬 퍼런 검이 물린 듯했다.

짐을 끌고 오는 소리가 들린다. 뒤를 돌아보니 양손에 하나씩 무거운 짐을 끌고 있는 여자 한 명이 통로를 지나 걸어오고 있었다. 밖을 지키고 있었던 두 명의 황실경비대였다. 내 앞에 있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까만 옷으로 온몸을 가렸다. 니아젤의 두 손이 자신의 것이 아닌 붉은색으로 범벅이다. 까만 옷을 입고 있는 탓에 핏자국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냄새로 알 수 있다. 저 정도면 중상이다.

살아 있어?”

. 숨은 쉬고 있습니다.”

그래. 그 정도면 돼. 끌고 오는 것으로 보아 팔다리가 무사하지 않을 거고, 숨소리도 거칠고 탁하니 갈비뼈도 몇 개 나갔을 거다.

들었지? 얘들까지 데리고 가. 내일 난 폐하를 알현하겠다. 그때 너희들이 여기 와서 청소도 좀 해 놓고.”

. . 털퍼덕. 데굴데굴. 니아젤이 한 손으로 두 놈을 연달아 던졌다. 땅바닥에 떨어진 녀석들은 곧 죽을 것처럼 신음을 냈다. 아직 정신이 있는 듯했다. 갑자기 기침을 하고 싶었다. 아물던 부위가 터진 것인지 목구멍 안에서 꽉 쥐어짠 걸레에서 나오는 물처럼 뜨거운 액체가 나오는 듯했다.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프다는 걸 보여 주면 저들의 전의가 되살아날 게 뻔했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황실경비대는 부상자를 데리고 황급히 별궁을 빠져나갔다. 입에 고인 뜨거운 액체를 삼킨다. 배가 금세 뜨거워졌다. 그러고 보니 며칠 동안 먹은 게 없었다. 아까 슐엔이 가져왔던 과일이라도 좀 집어 먹을 걸 그랬나. 숨을 내쉬는데 체력이 급격하게 빠져나갔다. 긴장이 풀리자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쓰러질 것 같았다. 아니, 쓰러졌다. 하지만 슐엔과 니아젤이 뒤에서 급히 날 껴안으며 부축했다.

황자님!”

피곤하군.”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아아. 그래. 부탁해.”

니아젤의 손이 내 어깨 위를 스치고 지나가자 온몸의 힘이 다 빠졌다. 그 사이에 슐엔은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의 문을 닫고 자물쇠를 걸어 잠갔다. 그 이후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게 아주 자연스러워서,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는 나를 니아젤이 지켜보고 있다. 역할이 바뀌고 말았군.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내 손을 그녀가 붙잡고 있었다. 그걸 보자니 저절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나는 숨이 고르고 얼굴도 평화롭다.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그저 잠들었을 뿐이리라. , 그렇다면- 나는 죽은 것인가.

아니야. 저기 숨을 쉬고 있잖아. 그럼 이건 꿈인가. 꿈치고는 너무 생생하지 않은가. 하지만 꿈이 아니라면 나를 내가 내려다보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때, 잠들어 있던 내가 눈을 떴다. 그것 또한 자연스러워서 처음부터 눈을 뜨고 있었던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니아젤은 내가 눈을 떴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점점 물들 것이다.”

내가 말한다. 누군가에게.

너는 점점 물들 것이다.”

침대 밑으로 나만 볼 수 있었던 새까만 안개들이 삐져나오고 있다.

그분께 바쳐라. 가장 고귀한 죽음을.”

아아. 그래. 그걸 나도 원하고 있었어.

 

고하기 부끄럽지만, 니아젤과 키스를 했다. 그래. 당신들도 알고 있는 그 키스를 얘기하는 거다. 개가 주인의 얼굴을 핥는 것처럼 애정을 담아 서로의 혀가 교미하는 뱀처럼 얽히고, 진지하게 서로의 타액을 교환하는 그런 입맞춤. 깨어났을 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잠에서 깨어난 기척을 느끼고 막 일어났기 때문에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니아젤의 얼굴이 정말로 아름다워서 넋이 나간 탓도 있다. 키스를 마친 후 그녀는 한동안 내 가슴에 머리를 묻고 울었다. 모든 게 내 잘못이었다.

어젯밤에 말했던 대로 황제 폐하를 알현하기로 했다. 거동이 불편하긴 했지만 움직이지 못할 수준은 아니라는 걸 어제 확인했었고, 목의 상태도 좀 나아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 오전에는 화타가 오지 않았군.

아니요. 황자님. 그런 이름을 가진 어의는 궁에 없습니다. 게다가, 황자님께서 오신 이후로 동쪽 별궁에는 어떤 사람도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니아젤님께서 어떤 사람도 믿을 수 없다며 모든 도움을 거부하셨거든요. 그것 때문에 황비께서 많이 언짢아하셨죠. 혹 고열 때문에 뭔가 잘못 아신 게 아닐까요?”

옷을 갈아입는 날 도와주던 슐엔이 걱정이 가득 담긴 어조로 설명했다. 다물어지지 않는 입에서 흘러내리는 침을 니아젤은 황급히 자신의 옷소매로 닦아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일정을 취소하시는 것도 고려해 주십시오.”

, . 괜찮아.”

헛것이었다고? 며칠간의 그 일이?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채비를 서둘렀다. 니아젤과 슐엔도 동행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준비에도 시간이 제법 필요하다고 했다. 결국 혼자가 된 나는 먼저 방 밖으로 나갔는데, 거기서 재미있는 상황을 만났다.

황실경비대 제8조 대원 전원, 비탄 황자님을 뵙습니다.”

아홉 명의 경비대원이 내게 머리를 숙인다. 어제 온 인원은 모두 일곱 명이었는데, 그중 둘이 엉망진창으로 당했으니 경비대 한 조는 열한 명으로 구성되겠군. 그리고 그들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 회색 계통의 옷차림을 한 노인 한 명이 서 있었다. 짧게 정리된 머리카락과 부드러운 눈매, 그리고 잘 갈무리된 기운 같은 게 느껴졌다. 그 노인은 바닥에 깔린 돌을 구두로 툭툭 차면서 두께를 가늠하는 듯했다.

어쩐 일이지?”

아는 척을 했다. 그제야 노인은 나를 쳐다보며 경비대원보다 더욱 깊게 머리를 조아렸다.

황궁 집사장 어빈, 빌즈탄 하츠 황자님께 인사 올립니다.”

음음, 그래. 집사장이란 말이지. 그 정도의 위치라면 내 상태가 이상하다는 건 이미 눈치챘을 거다. 뻔뻔하게 가기로 마음먹고 대충 둘러댔다.

황실경비대에 이곳 청소를 좀 부탁했는데, 집사장에게까지 수고를 끼쳤군.”

아닙니다. 황가의 사람들을 돌보는 것 또한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입니다.”

씁쓸했다. 그래, 니아젤은 황가 사람이 아니지.

고맙군. 그동안 내가 생각이 짧아 이곳을 돌보지 못했는데, 집사장께서 신경을 좀 써주면 좋겠네만.”

확실히 이곳을 오랫동안 찾지 않으셨지요. 어차피 동궁을 거처로 쓰고 계시니 별궁을 정비하는 동안 그곳으로 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아니. 최대한 빨리 안쪽 침실부터 정비해 주게. 오늘 저녁부터 쓸 수 있도록.”

실례가 아니라면 그래야 하는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가 절벽이랑 인접해서 더 안전해.”

경비대원의 어깨가 조금이라도 들썩였다면 웃겼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저들도 되게 뻔뻔했다. 어빈은 하얀 면장갑을 끼고 있는 손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와중에 나는 경비대원들의 손을 살피려고 했으나 한결같이 갈색 가죽 장갑을 끼고 있어서 어떤 이가 어제 습격을 감행한 것인지 눈으로는 파악할 수 없었다.

그렇군요.”

생각을 마친 어빈이 자신의 계획을 말한다.

오래전부터 따로 모아 쌓은 황자님의 예산 장부를 살펴봐야겠지만 별궁을 오늘 내로 정비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 다만 그렇게 할 경우 동궁에 있는 가구들을 많이 옮기게 될 것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 빈 가구들은 금세 채워 넣을 수 있습니다.”

. 아니. 동궁은 그대로 둬.”

거길 보면 내 취향은 어떤지 대충 파악할 수 있을 터.

여긴 니아젤의 취향을 고려해서 되도록 간단하게 꾸며줬으면 하는데. 가능할까?”

그럴 경우 궁내부 예산을 쓰게 됩니다. 서류가 작성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군요.”

아니야. 내 장부에서 빼.”

허나 그것은

어빈의 말이 도중에 끊겼다. 때마침 준비를 마친 니아젤과 슐엔이 밖으로 나온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니아젤은 어제의 청색 원피스보다 프릴이 좀 더 풍성한 짙은 곤색 드레스를 차려입었는데, 허리 아래쪽으로 곳곳에 갖가지 색을 띤 보석들이 박힌 게 꼭 밤하늘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들은 경비대원들을 보고 잠깐 표정이 굳었지만 어빈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간신히 미소를 되찾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어빈은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황자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역시 눈치가 빠르다.

. 부탁해. 아참.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

듣고 있나이다. 말씀하십시오.”

빨래는 물론 청소부터 짐 옮기는 것까지. 모두 저놈들 굴려. 하녀나 하인 부르지 말고.”

, 물론입니다.”

어빈이 처음으로 웃었다.

 

내가 길을 몰라 머뭇거리자 다행스럽게도 슐엔이 눈치껏 앞장섰다. 니아젤은 나보다 두어 걸음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동궁을 통과하지 않고 밖으로 빠져나가는 통로를 지나 중앙으로 향했다. 중간 중간에 슐엔과 같은 옷을 입은 하녀들이 보였고, 중앙 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주황색 정복을 입고 창을 들고 있는 경비대원이 지키고 있었다. 아무리 얼굴을 아는 이라도 자신의 신분을 밝혀야 들어갈 수 있는 듯했다. 그 외의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미 오전 정무회의가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비탄 황자님.”

경비대원들이 나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정무회의가 시작된 관계로 중앙 궁 출입이 통제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목이 아픈 나를 대신해 슐엔이 나서서 말한다.

비탄 황자가 위대하신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자 합니다.”

예정에 없는 일이라 지금은 곤란합니다.”

. 그렇군. 하지만 나중에 따로 보는 것도 곤란한데. 이런 일은 보는 눈이 많을 때 해결하는 게 좋아. 그때였다.

비탄 황자님은 나와 함께 가시기로 했다. 서류는 정정해서 오후에 제출하지.”

뒤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톤이 가볍게 경쾌하지만 맺음이 분명하고 무게가 있었다. 사람들이 들었을 때 대체로 호감을 가질 만한 목소리였다. 뒤를 돌아보다가 얼핏 니아젤의 표정을 봤는데 그녀는 대단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도 상대의 얼굴을 보고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금실로 황실의 문장이 새겨진 붉은 정복을 입은 금발의 사내. 햇빛을 받아 더욱 빛나는 잘생겨 보이는 외모에서 니아젤과 닮은 점을 충분히 찾아낼 수도 있었다. 본능적으로 화타가 얘기했었던 그 사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궁에서 가장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 트뮌 드라젤. 나무로부터 비롯되어 지금에 이르렀다는 모든 우든 울프를 대표하는 자이며 나아가 제국의 모든 행정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총리대신이다. 니아젤의 친오빠이며 한쪽 다리를 잃은 아비의 자식이자, 나에 대한 증오와 불신을 가슴에 품고 있는 남자다. 그가 작성한 살생부의 맨 위쪽에는 당연히 내 이름이 있을 거다.

경비대원들이 창을 거두었을 때 나는 드라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말았다.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다면 미소조차 칼날처럼 보일 게 분명했다. 게다가 그는 옆구리에 사람의 머리만 한 두께를 가진 책을 한 권 꽂아놓고 있었는데, 그걸로 내 머리를 친다면 꽤나 아플 듯했다. 살짝 한 걸음 옆으로 떨어졌다.

뭘 그리 긴장하십니까.”

책을 좀 멀리하는 성격이라서.”

오늘 아침 대출기록을 보니 그렇지도 않더군요.”

소름이 끼쳤다. 내 이름으로 책을 빌린 것도 아닐 텐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모르는 척을 하자 드라젤도 이 이상 파고들 생각이 없는지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아마 이 남자도 황제와 한패일 것이다. 동기는 분명하고, 내 최근 동정을 면밀히 감시하고 있다는 투로 말하는 걸 보면 의심해야 하는 건 당연했다.

니아젤. 기를 거둬라. 곧 어전이다.”

.”

수풀 속에 몸을 숨긴 채 곧장 사냥감을 향해 뛰어들 사자처럼 안절부절못하던 니아젤이 오빠의 지적에 흥분을 가라앉힌다. 슬쩍 눈을 굴려 옆을 보니, 1년간 얼음감옥에 감금되었다가 나온 죄수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 드라젤의 얼굴이 보였다.

대회의실에 속한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렸다. 현재 진행 중인 안건에 대한 논의가 끝나거나 중간 휴식이 있지 않는 이상 어느 누구도 중앙 궁 대회의실에는 출입할 수 없었다. 때문에 대회의실 문은 안쪽에서 열리도록 되어 있다. 회의가 없는 평소에는 바깥에서 안을 볼 수 있도록 활짝 열어놓는다. 나는 문 반대쪽에서 니아젤과 함께 서 있었고, 지금 얘기 중인 안건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는지 드라젤은 곧장 대기실에 놓인 의자로 가 앉더니 눈을 감았다. 우리들과 대화할 생각이 없음은 확실했다.

지금 어떤 안건이 진행 중인지 알고 있어?”

사절이 도착해서 그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인데?”

황자님 초상이 가장 인기 있는 나라요.”

저번에 읽었던 역사서의 기록들이 아주 잠깐 머릿속에서 번갯불처럼 번뜩였다.

표적지로?”

.”

콜덴이군.

여기로 나오겠지?”

중앙 궁으로 들어가는 출입구는 모두 네 곳이지만, 대회의실로 통하는 문은 여기뿐이니까요.”

, 어떻게. 노려보아야 하나?”

의연하게 계시면 됩니다. 오늘 아침에도 잘하셨잖아요.”

오늘 아침이라 하면 어제 날 죽이러 왔던 녀석들과 마주했을 때인가. 니아젤의 부드러운 미소를 보고 있자니 눈이 자꾸 입술에 닿아서 장난기가 발동했다.

난 키스밖에 기억이 안 나는데.”

대가는 엄청났다. 새빨개진 얼굴까지는 내 상상과 동일했는데, 그것이 미처 반응도 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다가와 부딪칠 줄은 몰랐다. 맙소사. 박치기라니. 심지어 나는 환자인데. 대장장이의 망치가 철을 두들겼을 때 울리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폭발했다.

아우아흐윽, , 죄송합니다!”

…….”

괜찮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인간적으로 너무 아팠다. 코를 감싸고 쭈그려 앉자 니아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리며 양 손을 허공에 대고 휘저었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웠지만 그렇다고 아픔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때, 드라젤이 자리에서 일어나 헛기침을 하지 않았다면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우리의 모습이 모두 보였을 것이다. 코에 얼얼한 통증이 펄펄 뛰는 활어처럼 헤엄치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참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진정되지 않는 것인지 니아젤은 대역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아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중후한 느낌의 불꽃처럼 생겼다. 그러니까 모닥불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이마 위쪽에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뿔들이 돋아나 산맥을 이루었고, 이마부터 눈까지 내려오는 피부에는 단단해 보이는 비늘들이 모여 군도를 이루었다. 눈빛은 주홍빛이 감도는 붉은색이며 인중 부근을 뒤덮고 있는 콧수염도 붉었고, 무엇보다도 얼굴 전체에 불길을 연상케 하는 짙은 회색의 무늬가 퍼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물감을 이용해 그린 것은 아닌 듯했다. 어깨 너머로는 용의 피를 이어 받았음을 증명하는 붉은 날개 한 쌍이 접혀 있었고 그 아래로는 도마뱀과 같은 모양을 한 꼬리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살랑살랑 움직였다.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신장이었는데, 사절이 이 정도라면 내가 죽인 총사령관은 더욱 크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탄 황자?”

내 얼굴이 표적지로 가장 인기가 있을 거라는 니아젤의 비유는 정확했다. 상대는 나를 바로 알아보았다. 강렬한 눈빛이 날아와 내 눈동자를 찌르자 코에 있던 통증이 싹 사라졌다. 니아젤이 귓속말로 내게 말했다. ‘현 국왕의 숙부인 후안 공작입니다.’ , 그래도 기억이 나진 않는다. 만나서 반갑다는 얘기를 하느니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게 나을 듯했다. 그가 무척 실망했다는 투로 이어 말한다.

건강해 보이는군. 감기가 심하다고 하던데.”

감기라. 그제야 웃음과 함께 말이 나왔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목소리가 꽤 상했습니다.”

, 이유는 다르지만 목소리가 상한 건 사실이었고 그는 다른 이유를 의심하지 않았다.

어차피 곧 다시 볼아니, 아니지. 이건 내가 말할 게 아니군. 어쨌든 건강을 잘 챙기고 있게.”

그리고 그는 내 뒤에 서 있는 니아젤을 쳐다보았는데, 표정이 금세 굳은 게 몹시 언짢은 듯했다. 후안 공작이 대기실에서 완전히 벗어난 후에야 그녀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명확한 답을 듣지는 못했다.

그것보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떨까요.”

. 니아젤의 말이 옳았다. 지금이 아니라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드라젤은 이미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대회의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을 느끼고 뒤로 물러설 뻔했다. 수많은 대신들 때문도 아니었고, 창문을 모두 닫아 놓아서 순환되지 않는 공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 하나, 단 한 명을 위해 만들어 놓은 대회의실은 그야말로 제전을 위해 만들어 놓은 공터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제단 위에는, ‘죽음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황제는 내가 상상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저것을 사람이라고 한다면, 내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한 정의를 모조리 갈아치워야 할 판이었다. 온몸에는 칠흑 같은 색의 철갑을 두르고, 외뿔 모양을 한 투구 속에서는 시체의 것처럼 보이는 노란 안광이 번뜩이며, 숨을 쉴 때마다 들썩이는 어깨 장식에서는 망자들의 비명이 깜짝 놀란 새처럼 소란스레 지저귄다. 그 밑으로 넘실거리는 안개는 나를 지켜주었던 것과 같은 것으로 보였지만, 그 양은 나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내가 단지 호수 위에 서 있었던 것이었다면 그는 바다를 거느리고 있었다.

황자님?”

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멈췄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린다. 앞으로 나아가려던 내 몸이 비틀거리자 겨드랑이 쪽으로 니아젤의 팔이 빠르게 쑥 들어왔다. 겨우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바닥을 바라보며 간신히 호흡하고 있는데 그 위로 음성 하나가 파도를 타듯 고요히 밀려왔다.

안색이 좋지 않구나. 좀 더 가까이 올 수 있겠느냐.”

왕 중의 왕. 황제의 목소리는 대회의실 전체를 가득 채울 정도로 근엄하고 깊은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니아젤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좀 더 앞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와 나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숨을 쉬는 게 힘들었다. 마치 이것은- 내가 호흡할 수 있는 공기를 그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종류의 느낌이었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 거 같지 않았지만 걸레를 쥐어짜듯 머릿속으로 수십 번이나 생각했던 말을 내뱉었다.

황제 폐하 만세. 빌즈탄 하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내가 뭘 잘못한 모양이다. 한쪽 무릎도 제대로 굽힌 거 같은데. 뭐가 잘못되었지.

이토록 진지하게 예의를 갖춘 모습을 보게 되다니. 기록관은 오늘 해가 두 번 뜨지 않았는지 꼭 확인하도록.”

가벼운 농담이었는지 이번에는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난 웃을 여유가 없었다. 그의 주변에서 풍기는 죽음의 냄새가, 정말이지 숨이 막힐 정도로 강렬했다. 시취(屍臭)도 이 정도는 아닐 거다.

마침 잘 왔다. 그렇지 않아도 너와 관련된 논의가 한창이었다. 드라젤 총리대신, 검토한 결과는 어떠한가?”

명하신대로 고()기록들을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매우 특이한 경우이긴 하지만 특별히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었습니다. 저희가 점령한 영토의 일부를 돌려준다는 조건도 몇 가지를 제외한다면 법적으로는 허용이 가능한 수준입니다.”

특별히 알아야 할 부분이 있나?”

현재 저희가 콜덴 왕국에서 요구한 영토는 대부분이 점령자인 하츠 황자님의 소유입니다. 따라서 콜덴 왕국에 반환할 경우 그의 허가가 필요합니다. 또한-”

황제가 오른손을 들어 드라젤의 발언을 막았다.

일단 거기까지. 황자의 생각을 들어보도록 하지.”

공포도 잊어버릴 정도로 멍해졌다. 뭘 알아야 대답을 할 거 아닌가.

포기할 경우 제국이 얻게 되는 건 무엇입니까.”

황제가 총리대신을 쳐다보았다.

황자님이 자신의 점령지를 포기할 경우 제국이 얻게 되는 건 콜덴 왕국과의 종전입니다. 그것을 위해 현 국왕의 숙부인 후안 공작의 영애가 이미 본국에서 출발하여 마차를 타고 이곳으로 오는 중입니다.”

영애가 온다고?”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 황자님과의 혼인을 위해서입니다.”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이건 정략결혼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날 부축하던 니아젤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 걸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대강 내용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군말하지 않고 떠나겠다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돈다. 아아, 그래. 그래서 불꽃처럼 생겼던 그 사람도 나중에 보자는 말을 하려고 했었군.

제게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형님이 있습니다.”

그래. 첫째 황자 로드릭이 있지. 하지만 그 애는 북부 전선에 있다. 당장 올 수도 없을 뿐더러 그곳은 매일 죽음과 얼굴을 맞대고 잠든다. 이건 두 나라의 평화 협정을 위한 혼인이다. 굳이 모험을 할 필요는 없지.”

아아, 이 얼마나 황홀한 거짓말인가. 과연 이게 어제까지 날 죽이려 했었던 인간의 판단이 맞나 싶었다. 그러나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내 몸에서 움직이는 곳은 오로지 혀뿐이다. 공포에 사로잡힌 다리는 마비가 된 지 오래였고, 바닥을 짚고 있는 팔은 움직이는 법을 잊었다. 고개를 들면 분명히 죽음이 흘러넘쳐 내려와 우리 모두를 삼킬 것이라고 상상하며 두려워하기에, 오로지 은혜로운 그의 명을 기다릴 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황제가 가지고 있는 건 같은 곳에서 비롯되었으나 전혀 다른 성질을 지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온전한 죽음이 생명을 탐했고, 내 그림자는 다른 이가 가진 어두운 면을 탐한다.

눈을 감고 잠시 현실로부터 도망친다. 여러 종류의 미래와 그 끝에 달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정말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불행과 내 행복을 동시에 보았고, 눈을 뜨자 모든 게 신기루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저는

멋대로, 입이 벌어지고, 내쉬는 숨과 함께 언어가 나오고, 언어에는 내 것이 분명한 의지가 실려 있고, 그것이 고개를 들어 죽음과 맞선다.

망나니입니다. 이 정략결혼의 옵션에 제가 포함되었다면 그건 결코 황실의 이익이 될 수 없을 거라 생각됩니다. 콜덴 왕국과 제국의 결합이 필요하시다면 형님을 부르십시오. 그게 순서입니다. 북부 전선에 자리가 빈다면 제가 그곳으로 가겠습니다.”